80대 여성 다큐 감독, 필름에 ‘세상’을 담다
| 등록자 | 관리자 | 등록일 | 2009-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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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희망을 일구는 사람들… 종로 경운동 사회복지센터 ‘영상’에 취한 어르신들
지난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운동 서울노인복지센터의 한 교실. 칠판 앞에 걸린 하얀 롤스크린에 프로젝션을 통해 한 편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이제 영화계에서 당당히 여성 감독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조경자(80) 할머니의 다큐멘터리 영화 ‘토플러와 그레이트 마징가’였다. 이는 10월14일부터 열리는 제2회 노인영화제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게 된 작품으로, 5세 된 외손자를 데리고 서점에 갔다가 잃어버릴 뻔한 기억을 떠올리며 서점 안의 풍경을 담았다.
영화는 종로구 종로1가 교보문고에 간 조 할머니가 어린이 한명한명에게 말을 거는 장면으로 시작됐다. “무슨 책 보고 있어”라며 다가간 할머니는 아이들이 어떤 표정으로 책을 보는지, 무슨 책을 보는지 손자를 둔 할머니의 눈으로 바라본다.
음악이 흐르면서 영상은 이제는 대학생이 된 외손자와의 추억을 담은 내레이션으로 이어졌다.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교육철학’에 따라 외손자를 데리고 대형 서점에 가곤 했었단다. 어느 날 조 할머니가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골라 계산하는 사이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외손자가 사라졌다. 깜짝 놀란 할머니가 이름을 부르며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만화책 ‘그레이트 마징가’를 품에 안고 “할머니, 이거 사야 해”라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외손자를 발견했다. 그때 할머니는 아이를 찾았다는 안도와 함께 “어린 것이 이 수많은 책 중에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격했다고 한다. 이날 할머니는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외손자는 ‘그레이트 마징가’를 선물로 안고 나란히 돌아왔다.
10분 남짓한 상영이 이어지는 내내 이를 지켜보는 10여 명 노인들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이날 수업은 영상미디어반에 소속된 노인 학생들이 마무리 수정작업 전에 그동안 촬영하고 편집한 작품들을 함께 돌려보며 토론하고 보완하는 시간. 자신의 작품을 상영한 조 할머니가 “내레이션의 끝과 음악 부분이 겹쳤어요. 타이밍이 좀 안 맞는 것 같네요”라며 쑥스러워하자 70대 전후로 보이는 동료들이 진지하게 작품을 평가하고 토론을 이어갔다. “주제가 너무 좋다”는 칭찬에서부터 “배경음악이 좀 더 다듬어졌으면 좋겠다”는 조언까지 다양한 반응이 잇따랐다. 2시간가량 진행되는 긴 수업이었지만 노인들은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힘이 난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가 내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그려내고 사람들과 소통하겠다”며 수업을 끝내면서 ‘파이팅’을 외쳤다.
서울노인복지센터에 미디어 강의가 개설된 것은 지난 2005년. 이곳에서 이미 조 할머니처럼 영화감독이 된 사례는 적지 않다. 당초 ‘미디어에서 소외된 노인들을 참여시키고 이해도를 높이자’는 취지였다지만 이 정도로 노인 학생들이 열심히 하고 실력을 쌓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2008년 제1회 노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올해 제2회 영화제에서 장려상 수상자로 선정된 조 할머니는 이 반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지난해에 데뷔했지만 젊은 감독들과의 경쟁에서도 뒤지지 않는 작품을 벌써 다섯 편이나 만들어 냈다. 같은 반 할아버지가 “이분이 제일 스타요”라고 기자에게 소개하자 조 할머니는 “아니 뭘…”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크로스백에 청색 모자, 남색 티셔츠를 입은 조 할머니의 모습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영화감독이었다.
조 할머니는 그 동안 꾸준히 여성 노인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저출산 문제를 다룬 ‘산부인과’를 첫 작품으로 ‘언제나 청춘’, ‘한옥예찬’, ‘꼬마 사장님과 키다리 조수’를 찍었고, 이번에도 ‘토플러와 그레이트 마징가’를 내놨다.
특히 2008년 제1회 노인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꼬마 사장님과 키다리 조수’는 조 할머니의 대표작이 됐다. 2008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특별 프로그램 ‘천 개의 나이 듦’에서 초청작으로 상영됐고, 2009년 들어서도 5월 제6회 서울환경영화제에 이어 7월엔 인천 주안역 앞 ‘영화공간 주안’에서 열렸던 제5회 인천여성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됐다.
이 영화는 카메라를 든 ‘키다리 조수(조 할머니)’가 ‘꼬마 사장(폐품수집상 할머니)’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는 모습을 담았다. 조 할머니는 “처음에는 딱한 처지에 열심히 산다는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배울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특히 부지런히 움직이는 ‘꼬마 사장’이 ‘키다리 조수’에게 “나이 먹었다고 그늘 아래 앉아 있지 말고 땀을 흘려 일을 하면 밥맛도 좋고 건강해진다”고 말하며 중국요리 집에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맛있게 먹는 장면이 맘에 들었다고 한다.
조 할머니는 지난해 수상을 기점으로 큰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작년에 처음으로 수상할 때는 정말 감동이었다”며 “특히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영화 분야에 뛰어들어 표현과 소통의 방법을 배우게 된 게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조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명언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이다. “내일 혹시 죽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냥 앉아 기다리지 않겠다”는 그는 “죽을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 바로 오늘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하는 게 내가 사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전문 감독으로서 세상의 보석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하는 조 할머니의 눈빛은 소녀처럼 반짝였다.
조 할머니와 함께 영상미디어반에서 활동하고 있는 안병균(75) 할아버지도 2008년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여성을 다룬 ‘그 여인의 일상’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안 할아버지는 “원래 영상을 좋아하는데 노인층이 다양한 취미를 즐길 데는 별로 없지 않느냐”면서 “이곳에 와서 더 깊이 알고 연구할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좋다”고 말했다.
구용성(66) 할아버지는 “미디어에 문외한인 노인들이 많이 있는데 막상 와서 배워 보니 아주 재미있다”며 “이 나이에 창의력을 발휘하게 되고 기술을 배우게 돼 만족도가 크다”고 말했다. 구 할아버지는 “사회에 노인 자신의 눈으로 다큐멘터리라는 대중적인 방법으로 이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아직 ‘입봉’을 하지 못한 구 할아버지는 자신의 첫 작품 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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